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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16년 8월 10일)
thinking

본인이 ‘여자’ 임을 잊고 사는 여자들이 많다. 흔히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 는 말을 한다. 맞는 말이다. 과거가 현재를 지배하도록 놔두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현재와는 구별된 일이라는 얕은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은 더더욱 문제가 있지 않은가. 과거의 과오 앞에 뻔뻔한 일본을 보라. 일본은 자기들은 이미 몇세대가 지난 후손들이고, 언제까지 그것에 얽매여서 사과만 하면서 살 수 없지않느냐는 입장이다. 왠지 기분은 나쁜데, 한편으론 이해가 가는 것 같기도 하다. 비단 일본뿐만이 아니라 사실 우리도 쉽게 그러해지지 않기 때문이지 않을까. 지난 일이라고, 지금의 나와는 상관 없는일이라고, 쉽게 느껴버리며 언제까지 그것때문에 미안하기만 해야하냐며, 자신을 과거로부터 분리시켜버리는 행동들이 얼마나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그런 우리가 캐나다가 최근 과거사를 대하는 자세를 보면서는, 쉽게 박수를 보낸다. 그렇다. 박수 받을만한 일이다. 우리도 그러해야하지 않는가. 수일이 지났고, 수개월이 흘렀고, 수년, 수세대가 지나고 흘러갔지만, 여전히 그것이 ‘나의 일’ 로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살아나야 하지 않는가. 어제 오늘 내일의 시간구분이 없으신 하나님 앞에, 비록 내게는 ‘어제’ 로 보일지라도, 여전히 잊지않고, 고쳐잡고 바로잡는 마음으로 현재를 살아가야하지 않겠느냔 말이다. 여자는 창세부터 뱀의 유혹에 넘어간 사람이다. 혼자 넘어가는것도 모자라서 아담까지 걸고 넘어뜨린 사람이다.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딤전 2:14

나는 성경이 ‘하와’라는 인물로 특정하지 않고 ‘여자’라고 칭한 데에 결코 가볍게 넘어가서는 안되는 요점이 있다고도 본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대속죄인이 되심으로,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우리의 모든 과오가 용서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그런 존재였다는 것’ 그리고 ‘지금도 얼마든지 그럴 가능성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뻔뻔해진다면, 계속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며 누군가의 가슴만 계속 더 찢고 찢게되는 일 아니겠는가. 솔로몬도 그런 말을 했다. 천명의 사람중 남자 하나는 찾을 수 있어도 여자는 하나도 찾을 수 없더라고.

“내 마음이 계속 찾아 보았으나 아직도 찾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 천 사람 가운데서 한 사람을 내가 찾았으나 이 모든 사람들 중에서 여자는 한 사람도 찾지 못하였느니라” 전 7:28

셀 수 없이 많은 세대가 지났다고 해서, 본인이 ‘여자’임을 잊고 사는 여자는,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는거다. 잠언 31장이 말하는 현숙한 여인은, 그런 여인이 되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본인이 창세부터 흘러오는 ‘여자’임을 잊지 않는데서부터 시작되는것 아니겠는가. 야고보 사도가 말한 것처럼, 믿음의 결과로써 믿음을 증명해주며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 행위다. 역사를 잊지 않은 민족이 ‘저절로’ 회개하는 마음, 고쳐잡고 바로잡는 마음과 자세로 살아가게 되는 것 처럼, 잠언 31장이 말한 현숙한 여인의 모습은 단지 행위로써, 마땅히 기억해야 할 것을 잊지 않을 때 ‘저절로’ 따라오게 될거라 생각한다. 이스라엘이 본인이 ‘이스라엘’이라는 것, 그러니까 이름대로 ‘하나님을 이긴 자,’ ‘하나님을 이길려고 한 자,’ ‘하나님을 이겨먹으려고 할 정도로 고집센 자’ 라는 사실을 잊는 순간, 온갖 불만과 고집과 불순종의 열매들이 반복적으로 쏟아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자가 ‘여자’임을 잊는다면, 현숙한 여인은 커녕, 역사속에서 벌어진 실수들만 반복하게되지 않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나 많이 벌어지고 있는가.


내가 이런 이야기를 당당히 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내가 바로 하나님을 남편으로 모시고 있는 교회, 곧 하나님 앞에 ‘여자’이기 때문이다. 비록 이땅에서의 육신의 성별은 남성을 지니고 있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하나님 앞에서의 ‘나’를 이해하는 일이 곧 ‘여자’를 이해하게되는 일이 아닐까 생각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