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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16년 8월 4일)
thinking

유명 청소년 단체 목사의 두 얼굴 어제며 오늘이며 연일 이 일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참 생각이 많이 들지만, 감정적이 되지 않으려 애쓰고있다. 최근에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이와 같은 (매우 흡사한) 일이 생각보다 많이, 그리고 생각보다 가까이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내게는 도저히 남일같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잘 드러나지도 않는다. 드러나는데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표현이 더 맞으려나. 위 기사도 무려 12년이 지난 후에야 드러난 일이다. 사건 발생시점을 기준으로 하면 16년이다. 세상속에서는 정말 교묘한 것들이 많이 발생한다. 그 교묘한 것들 중에는 ‘이단’이라 판정난 것들도 있다. 하지만 너무 교묘해서 그것을 일일히 판명하기엔 불가능할 정도로 너무 많은 에너지가 소비되는 것들도 있다. 흖게는 ‘사랑’이라는 것으로 교묘하게 둔갑해서, 일어나선 안될 일들이 지금도 얼마나 많이 벌어지고 있는가. 비단 이것은 남의 일이 될 수가 없다. 눈에 확 띄고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정도의 ‘확실한 막장’의 인생을 걷고있다면, 오히려 쉽고 어떤 면에선 되려 ‘다행’ 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너무 교묘해서 드러나지도 않고 구별도 잘 되지 않는 ‘고 지능적 막장’의 인생을 걷고있다면, 대체 어떻게 어디서부터 해결을 할 수 있겠는가. 정말 개탄을 금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나는 이와 같은 일 앞에서 사람들 사이에 당연스레 일어나고 있는 ‘일방적 가해자’와 ‘일방적 피해자’를 구별지어버리는 일에는 조심스러워야 한다고 본다. 우리의 싸움은 궁극적으로는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엡 6:12). 누구 하나 붙잡고 ‘천하의 나쁜놈’ 만들어버려서 해결 될 일이 아니라는거다. 우리는 쉽게 결론 내어버리는 것에 너무 익숙하다. 예를들면, ‘내 집안에 고난이 찾아오는 것은 대대로 물려받은 저주때문이다’ 라던가, ‘내가 언제 어느 순간에 그러한 일을 저질렀기/이루었기 때문에 지금 내게 이런것들이 주어진 것이다’ 라던가, ‘내 인생이 지금처럼 꼬여버린 것은 저 죽일놈이 그 때 그 순간에 뒤통수를 쳐버렸기 때문이다’ 라던가, ‘재수없게 사람 하나 잘못만나가지고 다 망쳤다’ 라던가, ‘나는 그 때 어리고 연약했는데, 어떻게 그사람은 나한테 그럴 수 가 있나’ 라던가, 어딘가에서 이유와 근거를 찾아내어 책임을 고스란히 전가시켜버리는 것에 익숙하다. 그리곤 그것을 어떻게해서든 되갚아주거나 탓하고 핑계대고 원망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것은 물론이다. 워낙에 한쪽 비난만 가득하기에 다른쪽 이야기도 던져보고자 한다. 언론을 통해 본인을 ‘피해자’라 주장하는 A양. 당시 고3 이었기에 사리분별을 하기엔 어렸다고 주장한다. 헌데, 그 얼마나 근사한 말로 세뇌를 시켰건 호텔방에 데려가서 벗은 몸을 보고싶다고 하는것에 수긍하는게 이상하다는 분별이 되지 않을정도로 어린 나이였을까. 그 모든 두려움과, 특히나 ‘첫 성관계’ 라는 두려움, ‘혼외관계’ 라는 두려움마저 이길만큼 그 남자에게 이미 선을 훌쩍 넘어버린 마음을 주고 있던건 아닐까. 그 여자가 옷을 벗는동안, 그리고 그 남자가 옷을 벗는동안, 그리고 침대에 누워 부둥켜 안게 되기까지 의외로 길었을 시간동안은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걸까. 실제로 남성 연예인과 여성 팬 사이에서 이런 성관계는 흔하게 그리고 암암리에 일어난다. 드러나지만 않을 뿐. 그렇게 ‘혼외정사’ 곧 불륜은 선망의 대상에게 푹 빠져 분별력을 잃어버린 여성과, 우상처럼 빛나는 남성 사이에선 어렵지도 않게 일어나는 일이다. 드라이브에도 흔쾌히 응하고, 단둘의 만남에도 감지덕지로 응하고, 호텔방에 ‘공부하자며 (혹은 어떤핑계로)’ 데려가도 흔쾌히 응하고, 벗은 몸 보고싶다는 것에도 응하고… 호텔방까지 들어왔는데, 옷까지 풀어헤쳐줬는데, 뒤늦은 거부에 ‘이미 늦었다’는 말은 어찌보면 당연히 나올 말 아니겠는가. 그 상황에서 ‘앗, 미안. 내가 성관계가 하고싶었었나봐’ 하며 놓아주길 기대했단 말인가. 그리고 이미 그들만이 아는 특별한 분위기 안에서 성관계가 이루어진 마당에 ‘아, 그때 내가 실수로 성관계를 했네’ 하며 이제와서 놓아주네 마네 하는것도 사실 어떻게 보면 현실성이 없는 일 아닌가. 일방적 가해자 되기를 인정하라는 꼴인데. 그게 가능할것같은가. 이미 성관계가 발생한 관계 안에선 여러가지가 섞인 복잡오묘한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 속에 남녀모두 끌려다니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미 부모를 떠나 한몸을 이뤄버린 관계기 때문에 부모의 개입이 맥을 추지 못하는것 또한 놀랍지 않은 일이기도 하고. 부모를 속이고 단둘이 해외 ‘이별여행’까지. 나이 차이만 많이 났을 뿐, 어쩌면 그들은 ‘아이돌-팬’ 관계에서 출발한 불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관계이었지 않나 싶다. 우울증과 죄책감, 왠지모를 책임감과, 빠져나오고 싶지만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올무같은 마음. 그것은 ‘피해자’임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아니라, 불륜관계에선 그림자처럼 당연스레 따라다니는 것들이다. 그런 그림자를 외면하기 위해, 많이들 그 그림자가 드러나지 않을 어둡고 고립된 곳 속으로 들어갈 뿐. 누가 진짜 피해자일까? 이 땅에서 내가 피해자임을 주장하고, 피해자로 인정받고, 위로받고, 위안 삼으며, 앞으로의 삶을 등 비비고 기댈곳과 함께 한다 한들, 정작 중요한 건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느냐 아닐까. 다윗은 가해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윗이 의식한 건 하나님의 시선, 곧 하나님의 마음이었다. 누가 진짜 가해자일까? 이동현 목사라는 사람이 저런 불륜을 저지르고 있을 때, 그의 주변에는 어떤이들이 무슨 역할을 하며 있었는가. 혹시 모를것에 대비한 관계적 안전장치 하나 없이, 어디로 튀어나가도 상관 없다는 듯 고삐는 풀려있고, 불은 더 활활 잘 타들어가도록 마치 마른 장작불같은 ‘순응 잘 해주는 어린 여성 팬’들만이 있던 건 아니었을까. 나와 너 할 것 없이 우리는 서로의 영혼과 생명을 지켜줘야 할 권한과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서로가 또 다른 가해자가 되지 않도록, 그리고 또 다른 피해자가 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서로의 영혼과 생명을 지켜주고 세워주고 일으켜주고 바로잡아줘야 하는 권한과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지난 관계들이 어떠하였든지를 불문하고, 성관계는 결혼관계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모두가 모두를 지켜주고, 흔들릴 때 붙들어주고, 잘못됐다면 바로잡아줘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해본다. 비록 세상의 법과 문화의 흐름은 더 이상 성관계를 결혼관계 안에서만 일어나도록 우리를 지켜주지 못할지라도 말이다. 누가 뭐라건, 남녀의 성관계는 한 몸이되는 일이요, 곧 생명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기엔 여전히 두 몸뚱아리 이겠지만, 나는 정말 그렇게 한몸 된 것을 어떻게 다시 떼어낼 수 있는건지 답을 얻지 못했다. 과연 더 이상 안하면 그만일까? 쉽게 해결 할 수도 없는 일이고, 무엇보다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인데, 어떤 이유에서건 일단 저지르고 보는 성관계. 정말 서러움과 안타까움,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마음뿐이다. 하나님 밖에는 찾을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