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에서 만나게 될 당신의 원수를 사랑하라 정말 공감이 많이 되는 글이다. 잘 풀어서 정리도 잘 된 것 같다. 기사 링크도 첨부하고, 아래엔 혹시 사라질까를 대비해 내용도 스크랩 해 넣는다.
지금 여기서 함께할 수 없는 이들과 어떻게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
예일의 동료 교수인 칼로스 아이어는 연로하신 어머니를 뵈러 갈 때면 그분의 친구들이 모여 사는 작은 쿠바 이민 공동체에 들러 그들의 신학 상담자가 되어 드리곤 했다. 한 여성이 그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카스트로가 죽어가면서 회심하면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예, 갈 수 있습니다.” 아이어 교수는 분명하게 대답했다. “바로 그게 기독교 신앙이지요. 속죄의 범위 밖에 있는 사람은 없답니다.” 그녀가 대꾸했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천국에 가고 싶지 않네요.” 칼 바르트는 쿠바 카스트로 정권에서 쫓겨난 이 여성의 질문과 반대 되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언젠가 천국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 사실인가요?” 바르트가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사랑하는 사람들뿐만이 아니랍니다!” 위대한 신학자의 이 예리한 한마디―당신이 싫어하는 사람들도 천국에서 만날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들로 천국을 가득 채우고 싶어 하는 우리의 바람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우리에게는 천국의 공간을 함께 나누고 싶지 않은 나만의 ‘카스트로들’이 있다. 그들이 있는 천국이라면 마치 지옥 앞마당 같을 것이라고 우리는 상상한다. 이 딜레마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도전을 던지고 있는데, 우리는 지금까지 이것을 신학적으로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서로 싫어하는 사람들이, 또는 서로를 증오할 만한 이유들이 있는 사람들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저 유명한 설교 제목처럼, “천국, 사랑의 세계” (Heaven, a World of Love)에서 어떻게 함께 지낼 수 있을까? 사랑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 사랑 받을 수 있는 사람들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사랑하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원수들이 친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어두웠던 지난날들과 찬란한 빛으로 물든 영원 사이에서 언젠가, 다시 말해, 다음 세상에 가기 전에 어디쯤에서,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들의 관계들에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이러한 변화가 없다면, 천국은 완전한 사랑의 세계가 되지 못할 것이다. 최선의 경우에도 숭고한 사랑마저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최악의 경우에는 차가운 무관심이 판을 치고 끔찍한 증오심이 불타오르는 곳, 곧 이 세상의 되풀이가 되고 말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변화는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
심판의 범위
우리의 신학은 불행히도 이 질문에 대한 설명을 제대로 못해 주고 있다. 로마가톨릭의 연옥 교리도 우리가 사랑의 세계에서 살 수 있으려면 일어나야 할 변화의 사회적 측면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지 못한다. 하지만 기독교 종말론에 설명의 자원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 종말론의 “최후의 두 가지”―최후의 심판과 죽은 자의 부활―가 이 세상과 천국 사이에서의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죽은 자의 부활은 이 문제에서 제껴둘 수 있다. 왜냐하면 죽은 자의 부활은 일차적으로 우리의 육체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의 부활은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한 응답이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은 도덕적 영역을 다루기 때문에 우리가 던지는 질문과 관련이 깊다. 최후의 심판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범죄와 인간들 사이의 범죄라는 문제에 대한 응답인 것이다. 최후의 심판과 관련한 사유 방식에서 두 가지 기본적인 유형이 있다. 첫 번째 유형의 전형은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는 최후의 심판이 “선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을 구분하여 “참되고 충만한 행복”은 “오로지 선한 사람들의 몫”으로, “당연히 받아야 할 최고의 불행”은 “오직 악한 사람들의 몫”으로 확정한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심판의 기능은 “선한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악한 사람들”과 구분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한 사람들은, 최후의 심판 전에 이미 완전한 사랑의 피조물인 경우에만, 최후의 심판 후에 완전한 사랑을 하게 된다. 최후의 심판에 대한 두 번째 사유 방식은 마르틴 루터와 관련이 있다. 루터는 최후의 심판을 하나님의 공의―이것은 악한 사람들과 선한 사람들을 구분한다―와의 만남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이것은 “선한 사람들”이 못되는 사람들을 의롭다고 인정한다―와의 만남으로 설명한다. 신자들에게 최후의 심판이란 무엇보다도 죄인이 용서받고 의롭다 하심을 받는 사건이라고 루터는 강조한다. 최후의 재판관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자비로우신 구주 그리스도와 전혀 다른 분이 아니시다. 루터는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그분은 의사요, 도움을 주시는 이요, 사망과 악마로부터 나를 구원해 주시는 이시다.” 역사의 마지막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은, 역사의 한 가운데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속죄 사역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칭의를 완성한다. 하지만 최종의 칭의가, 말하자면, 사랑의 세계를 만들어낼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물론 우리가 지금 여기서 그다지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천국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스럽지 않은 그 사람들을 사랑하려면, 두 가지 일이 일어나야 한다. 첫째, 나는 이 말을 매우 조심스럽게 사용하는데, 우리가 직접 그들을 “의롭다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도 우리를 그렇게 생각할 것이므로, 그들도 역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 서로에게서 이와 같은 “칭의”를 받아야 할 것이다. 둘째, 우리는 또한 서로 친교하기를 원해야 할 것이다. 사랑의 세계로 안내 받으려면, 지상의 존재에서 천상의 존재로의 변화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행동(최후의 심판)으로만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사회적 사건(최후의 화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을 하나의 명제 형식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천국이 사랑의 세계가 되려면, 현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의 전환―하나님께서 이것을 이루실 것이다―에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의 측면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 그럴까? 인간의 본성, 죄의 성격, 구원의 모습에 그 답이 있다.
화해는 사회적이다
인간의 본성에 관해서는 많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논란의 여지가 많은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그렇지만 인간이 사회적 피조물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첫 장부터 성경은 인간을 복수로 표현한다. 하나님께서 “그들”― 남자와 여자―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책임을 맡기셨다. 이 사실은 매우 중대한 결과를 가져온다. 우리는 가족 안에서 태어나고, 다른 사람들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그리고 사회적 단위로 살기 마련이다. 우리의 구체적인 정체성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와 관계 맺는 방식에 따라서, 그리고 우리가 그들과 관계 맺는 방식에 따라서 형성한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보자. 부모의 행동이 자녀의 성격을 형성한다. 유전적 요인에 대한 최근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부모가 자식을 “망칠 수”도 있고 잘 되게 할 수도 있다는 옛 지혜는 지금도 유효하다. 자녀가 부모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도 똑같이 진실이다. 막내아들 나다나엘이 없다면 나는 동일한 사람일까? 그 아이가 나에게 왔기 때문에 나의 세계가 바뀌었으며, 나의 정체성이 바뀌었고, 그리고 나는 지금도 바뀌고 있다. 우리의 죄악도 우리의 정체성과 마찬가지이다. 정의하자면 모든 죄가 곧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범하는 죄의 대부분은 다른 사람들과 관련되어 있다. 다른 사람들과 평화롭게 살기보다는, 우리는 끊임없이 분쟁에 휘말린다. 예를 들어, 우리는 크든 작든 다른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그들을 부당하게 대하고, 속인다. 아주 어릴 때부터 내내 약한 사람들은 강한 사람들의 손아귀에서 고통을 당하며, 오늘의 희생자의 분노는 내일의 가해자를 낳는다. 더 나아가, 죄 자체가 사람들 사이에서 일종의 그릇된 유대 관계를 만들어 낸다. 가한 해악과 당한 해악 둘 다 올바른 관계를 파괴하고 뒤틀린 관계를 조장하여 희생자와 가해자가 과거를 청산하려고 새로운 죄를 짓는다. 이 모든 사실에서 우리는 중요한 핵심에 이르게 된다. 우리의 정체성이 사회적으로 형성되고 죄는 성격상 사회적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사람들의 변화와 치유는 사회적 관계를 포함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사이먼 비젠탈이 「해바라기」(The Sunflower)에서 들려주는 유명한 일화를 보자. 어느 나치 친위대 병사가 죽어가면서 비젠탈에게 고백했다. 나치가 불을 지른 건물에서 한 유대인 가족이 피신하려고 할 때 자신이 그들을 살해했다고. 죄책감에 시달린 그는 유대인에게서 용서 받기를 원한다. 마음이 흔들렸지만, 비젠탈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난다. 비젠탈이 그렇게 행동한 데는 희생자만이 자해자의 범죄를 용서할 수 있다는 생각도 있었다. 가해자의 요청과 비젠탄의 거절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 그 가해자는 자신이 저지른 악을 어찌할 수 없다는 고통스런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비젠탈에게 용서를 구했다. 그는 희생자의 자비를 간절히 원했지만 희생자는 이미 이 세상에 없기 때문에 대신 용서해 줄 사람을 찾아야 했던 것이다. 자비를 거절한 비젠탈의 행동은 제삼자는 가해자를 용서할 수 없으며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를 고칠 수도 없다는 옳은 통찰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용서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이렇게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라고 할 수도 있고 ‘아니다’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단지 제삼자에 지나지 않는 분이 아니라는 분명한 근거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웃에게 행한 잘못을 용서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가 희생자의 용서 ‘하기’와 가해자의 용서 ‘받기’를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용서만으로 충분하다면,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마5:23-24)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무의미해지고 말 것이다. 하나님과 화해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멀어진 이웃과 화해해야 한다. 희생자와 가해자 모두를 품으시는 하나님의 포용은, 어떤 의미에서는, 희생자와 가해자가 서로 포용하지 않는다면 완성될 수 없다.
‘새 출발’ 그 이상
하나님과 화해할 뿐만 아니라 서로 화해해야만 우리는 온전히 구원받을 수 있다. 따라서 천국에서 누리게 될 희석되지 않은 구원 경험은 반드시 사회적 화해를 포함한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의 욕망에서 해방시키시고 영원한 생명과 완전한 새 출발을 주시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내가 십대였을 때, 한 유명한 설교자가 ‘새로운 페이지’ 이미지를 사용하며 회심할 때 일어나는 일을 설명하곤 했다. 유년 시절에(‘삭제’ 키나 볼펜이 나오기 전이었다), 그는 한 페이지를 다 쓰기 전에 늘 글자를 틀리거나 잉크를 쏟았다고 말했다. 망친 페이지 때문에 어수선해진 마음을 그는 새 페이지로 넘겨 새 출발을 하면서 달랬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새 출발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천국이 바로 그런 곳이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천국은 우리의 실수는 사라지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출발을 허락하셔서 이후로는 어떤 실수도 없이 페이지를 채울 수 있게 되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옳은 말은 아니다. 천국은 단순한 새 출발 그 이상이다. 천국은 새로운 미래의 창조 그 이상이다. 천국은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구속, 곧 우리가 살아온 삶 전부의 구속이다. 천국은 새 페이지에서 새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망쳐버린 페이지를 다시 깨끗하고 바르게 하는 것이다. 이제 이것을 우리가 서로에게 저지르는 잘못―우리가 짓는 대부분의 죄―에 적용해 보자. 증오로 가득한 과거를 구속 받으려면, 우리에게 새 출발이 주어지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관계들이 회복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화해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의 최종적인 사회적 화해는 이 땅에서 천국으로 옮겨갈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까다로운 은혜
그렇다면 최종의 화해와 최후의 심판은 어떤 관계일까? 생각해 보아야 할 중요한 점이 적어도 세 가지는 있다. 첫째, 최소한 신자들에게는, 최후의 심판은 곧 은혜의 심판이다. 왜? 그 재판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대신해 죽으시고 우리가 받을 형벌을 대신 받으신 오직 그분뿐이기 때문이다. 최후의 심판의 날은 그의 날이다(빌1:6). 그 심판대에는 그리스도께서 앉아계신다(고후5:10). 살아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는 그들을 의롭다하시기 위해 죽으신 바로 그분이시다. 하지만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은혜의 심판은 관대한 심판이 아니다. 은혜와 공의를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은혜는 공의를 부정하지 않는다. 은혜는 공의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공의가 주장하는 권리를 초월한다. 은혜의 심판은 까다로운 심판이다. 은혜의 심판은 공의에 반한 우리의 행동뿐만 아니라 은혜에 반한 우리의 행동을 평가한다. 질문의 핵심은 “너희가 규칙을 따랐느냐”가 아니라 “너희가 자비를 베풀었느냐”에 있다(마18; 마25). 심판의 날에 모든 사람들의 죄가 낱낱이 밝히 드러날 것이지만, 은혜의 맥락 안에서 이것이 밝혀질 것이기 때문에 모든 신자는 이미 그들의 “의와 거룩함”이 되신(고전1:30) 동일하신 그리스도에 의해 죄책에서 해방되고 변화될 것이다. 둘째, 최후의 심판을 구약의 예언들을 배경으로 살펴보면, 심판은 사회적 사건임이 분명하다. 주께서 이스라엘과 억압적인 지도자들 사이에서(겔34:17), 그리고 “많은 민족들”과 “먼 곳 강한 열방들” 사이에서 심판하실 것이다(미4:1-3; 사2:4). 이러한 예언들 이면에는 “여호와께서 너와 나 사이에 판결하시기를 원하노라”라는 법률적 관용구로 분명하게 표현되는 심판의 개념이 들어 있는데, 이 관용구의 분명한 목적은 분쟁이나 갈등 이전에 평화를 회복하려는 것이다. 심판은 단순히 당사자들 각자에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들 사이에서도 이루어진다. 따라서 심판은 단순히 유죄와 무죄의 확정이나 형벌과 상의 처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심판은 당사자들의 사이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것이다. 셋째, 심판 받는 당사자들이 승복하지 않는다면, 완전한 사랑의 세계로의 이전하는 것으로서의 최후의 심판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그 판결을 주권적 하나님의 통치로 받아들이고 마음으로 동의해야 한다. 이런 상황을 상상해 보자. 하나님께서 선고하시자 당신이 이렇게 말한다. “터무니없는 판결입니다! 저의 잘못은 과하게 보시고 저의 대적이 저지른 죄는 잊으셨습니다. 변호사를 새로 선임하고 항소하겠습니다!” 물론 이런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천국에 거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성령의 권능으로 각 사람이 자신은 의롭다고 스스로 판단하려는 시도를 삼가고, 자신이 지은 모든 죄를 전적으로 인정하고, 죄책과 죄의 권능에서의 해방을 경험하며, 다른 사람들도 모두 이와 같이 했다고―자기 의를 포기하고 자기 죄를 인정하고 해방을 경험했다고―인정할 때, 하나님의 심판은 그 목적을 이루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변화되었음을 인식할 때, 곧 다른 사람들도 죄에서 해방되었고 진정한 정체성을 얻었다고 인정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을 더 이상 정죄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에게 용서의 은혜를 베풀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우리를 대신하여 심판 당하시고 우리가 받을 형벌을 대신 받으신 재판관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리고 우리와 연결되어 있는 다른 모든 사람들을 대하게 될 것이다. 바로 그날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는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용서의 은혜로, 그리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은혜로 바뀔 것이다. 이처럼 용서를 주고받을 때 우리는 최종의 화해에 이르는 문턱에 서게 된다. 그러나 최종의 화해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용서는 적대와 포용을 가르는 경계선이기 때문이다. 용서는 포용의 장애물을 제거할 뿐이지, 용서 자체가 원수의 포용은 아니다. 용서를 베풀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각각 자기 길로 갈 수 있다. 피해를 입은 쪽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당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더 이상 당신을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각자의 길을 가는 게 좋겠네요.” 가해자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당신의 용서를 받지만, 앞으로는 당신과 어떤 관계도 원치 않습니다.” 옛 원수들이 서로를 향해 나아가고, 같은 사랑의 공동체에 속한 사람으로서 서로를 안아줄 때 비로소 화해는 이루어진다. 그렇게 서로를 안아줄 때, 삼위일체 하나님의 친교 안에서 서로를 기뻐하며, 함께 자유롭게 사랑의 춤을 추게 될 것이다. 내가 최후의 심판과 최종의 화해에 관한 강의를 막 마쳤을 때, 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학생이 내게 다가왔다. “당신이 하시는 말씀이 정말 어떤 이야기인지 아시나요?”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그 학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바로 짐작이 갔다. 그 학생의 선조들은 노예였고, 그 노예 선조들의 주인들은 ‘선한’ 그리스도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천국에서 그녀는 그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나는 대답했다. “예, 알지요. 정말 힘든 일이겠지요.” 내가 만약 그 학생이라면,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그 진주 문에 들어가면 난 이렇게 할 거야. 노예 주인들이 하늘나라의 동쪽 끝에 살게 된다면, 베드로가 나를 서쪽 끝으로 보낼 때까지 나는 한 발짝도 떼지 않을 거야. 천상의 어떤 만찬에서도 나는 노예 소유주들과는 절대로 같은 자리에 앉지 않을 거야.’ 최종의 화해를 생각하면서 그 학생은,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나는, 마음이 착잡했다. 잠시 후 그 학생이 입을 열었다. 내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에게 들려주는 말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화해할 수 없는 곳이라면, 천국은 천국이 아니겠지요.” 우수에 젖은 두 눈에 희망의 빛이 서렸다. Miroslav Volf, “Love Your Heavenly Enemy” CT 2000.10.23; CTK 201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