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존파 사건, 조희팔 사건을 비롯해 최근에 벌어진 ‘강남역 묻지마 살인’ 사건까지. ‘내’가 기준이 되고 ‘내’가 주체가 되었을 때 참으로 어디까지 자연스러울 수 있고, 태연할 수 있고, 심지어는 떳떳하기까지 할 수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 해 보게 된다. 실제로는 사기요, 살인을 저지르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기준에서는 당연한 일이요, ‘정의 구현’이자, ‘거룩 실천’을 하고 있는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심지어는 성도를 대상으로 ‘사기’를 치고 있는건지, ‘살인’을 하고 있는건지도 분별 못한 채, ‘내’가 기준되어 목회하는 이들도 많지 않은가. 불륜과 간음도 사랑이 되고, 동성애를 용인하는 것조차도 사랑이 되는 세상이다. ‘어떻게 저게 말이 돼?’ 하는게 말이 되어지고 있지 않는가. ‘내’가 기준이 되면 안될게 뭐가 있을까 싶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시 139:23-24)
시험이라는게 결코 달콤한 것은 아니리라. 하지만, 유일한 객관이시고, 유일한 기준이신 하나님께서 저울질 해 주지 않으시고, 자로 재어주지 않으시고, 시험해 주지 않으시면, 나는 내가 사기를 치고 있는건지, 살인을 저지르고 있는건지, 어떻게 완전히 알 수 있겠는가 생각해본다. ‘하나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영원 불변의 유일한 객관, 유일한 기준이신 하나님. 그 하나님 없이는 그 어떠한 막장도 용인되는 건 단순한 시간문제이지 않을까.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