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에 보면, 인간이 죄에 빠지고서 너나 할 것 없이 남 탓하기에 급급하던 모습을 본다. ‘혹여나 나의 이러한 모습이 너마저 죄에 빠지게 한 건 아니었나’ 살피고, 걱정하고, 하나님 앞에 두려워하고, 상대 앞에 조심스러워하는, 그런 하나님 마음에 합한 모습은 없었다.
요즘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얼마 전 미국의 한 고등학교에서 체육시간에 요가팬츠를 입은 여학생이 남학생으로부터 원치않는 접촉 (‘unwanted touch’)을 당했다며 성추행 피해자로 목소리를 냈던 적이 있다. 그 여학생과 그 학부모의 주장에 따르면, 어떤 옷을 입건 자유고, 자극을 위해서 입은것이 아니라 편해서 입었으며, 남학생만이 전적인 가해자였다. 남학생측 주장에 따르면, 요가팬츠를 입는것이 시각적 자극적이 크므로 금해야한다고 한다. 어떤 이끌림에 이끌렸던 상대가 원치 않는 신체적 접촉을 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그리고 요가팬츠를 입은 여자들이 시각적인 자극이 크게 되는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나의 이러함이 저 사람을 죄에 빠뜨렸구나’하며 책임을 통감하고, 상대에게 먼저 미안해하고, 또 하나님께도 먼저 미안해 하는 그런 낮은 자세를 보는 것이 아니라, 배려와 사랑은 전혀 없고, ‘너가 죄에 빠져 넘어지던 말던, 나는 내 자유 권리에 따라 편한 것들 하고 산다’ 는 듯한 ‘나 중심’의 모습밖엔 보이고있지 않나.
탓하고, 비난하고, ‘여성들이여, 상대를 죄에 빠뜨렸다고 자책하지 말고 깨어 일어나길 바란다’고 하거나, ‘너의 권리고 권한이고 자유다. 죄 지은건 그 사람이지 너가 빠뜨린게 아니다’ 라고 큰소리부터 치는 것 같다.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이 사회속에, 한 사람이라도 타락의 길을 걷고있다면 그건 내 책임인거다. 한 사람이라도 죄에 넘어졌다면,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가 미안해하고, 다시 일으켜세워주고, 너나할것 없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도저히 이해가 안간다’ 며 마치 나는 좀 다른 듯, 나는 좀 구별된 듯한 마음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건, ‘나의 일’ 처럼 민감하게 느끼는 감각의 회복인 것 같다.